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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승탑역사순례3(2026.5.2) 고려시대 승탑

다시산내댁 2026. 5. 16. 21:08

승탑역사순례 세 번째 시간은 고려시대 승탑입니다.

실상사에 고려시대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 당시 실상사를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실상사가 속한 지역, 남원이나 지리산권에 대한 사료들을 보며 고려시대의 실상사 상황을 추론해 보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지리산권에 문화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신 순천대 사학과 이종수 교수님을 모시고 강의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의 내용 요약

<실상사의 개창시기와 한국불교상황>

먼저 간략히 실상사가 시작되던 9세기 한국불교상황을 알아봅니다.

중국에서 7세기경 시작된 선불교는 중국에서도 주변의 경계로 이단 취급당하고 9세기 초 회창폐불탄압으로 주변 산에 정착하게 되는데,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도입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선불교도 경주가 아닌 주변의 산지에 정착을 하여 산문을 형성하게 됩니다. 실상산문은 신라하대 시대상황의 영향도 있어서 그 중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산문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게 되고, 정치적으로도 신라하대 중앙세력이 약화되면서 선불교는 지방 호족과 결합하게 됩니다.

실상산문에서는 진골출신의 수철이 홍척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나 규모와 예술성을 갖춘 석탑이나 석등, 철불등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통일신라 입장에서 주요 사찰의 경우 중앙의 장악력을 높일 필요가 있어 수철화상을 통해 왕실이 지원했던 것으로 보이며, 승탑에 후백제의 연호가 새겨진 편운화상은 후백제 견훤세력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려시대에는 광종때 불교를 정리하여 선종은 9산산문으로 인정하고, 교종은 화업종과 법성종으로 정리되어 승과조직 정비와 승과시험도 만들게 됩니다. 고려 왕실입장에서는 개경과 멀리 떨어진 실상사를. 포섭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9산선문으로 인정하고 규모가 큰 목탑지등이 발굴시 발견된 것은 왕실지원이나 힘있는 권력에서 지원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적어도 목탑이 만들어 질 때까지는 실상사가 고려중앙정부와 연결이 있었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런데 실상사가 언제부턴가 이제 쇠락하기 시작하는데 고려 말에 여기가 전쟁으로 불타고 그래서 쇠락했다고 추정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정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고려시대 대장경판각과 관련한 실상사>

그리고 실상사가 어떤 형태로든지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두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대장경판각입니다.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 시기인 1011년 경 고려 현종이 만들기 시작해 70여년에 걸쳐 조성하였습니다. 이를 만들기위해서는 국가의 뒷받침은 물론이고 수요를 창출할 문화적 수준, 대장경을 이해하고 새길 수 있는 불교계의 역량과 인쇄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개경을 중심으로 만들고, 몽골침입시 팔공산에 모셨는데 몽골에서 다 불태우고 경주 황룡사까지 불태운 역사가 있지요. 이렇게 불타고 나서 다시 조성한 것이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입니다. 이를 재조대장경이라고 합니다.

 

그 재조대장경을 만들었던 곳이 지리산일대라고 하는 것이 최근 통설입니다.

그 재조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천도해서 만들었다라는 의견에서, 고려대장경에 남해 분사도감이라는 표현이 나와서 남해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장견판본들의 재료인 나무들을 분석해보니 산벚나무, 돌배나무등 지리산일대에서 자라는 나무들로 만들어졌다고 밝혀져서 지리산일대에서 판본들이 만들어 졌다는 학설이 당분간은 유지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리산 일대에눈 옛날부터 사찰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이 사찰들을 중심으로 목판을 판각하도록 했을 것이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리산 일대의 사찰이라고 하면 남원의 실상사는 빼놓을 수 없는 사찰입니다. 따라서 재조대장경을 지리산일대에서 만들대 실상사가 배제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많은 사찰에서 판각을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그 어느 사찰에서 판각했다 이런 기록은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실상사도 거기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십니다.

 

지리산권을 중심에 놓고 봤을 때 큰 사찰이 당시로서는 곡성에 동리산문도 있고, 진주 쪽으로 가면 단속사지가 있습니다. 그런 사찰들을 포함해서 여기 실상산문 선종의 사찰들도 그런 판각에 동참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단속사는 고려시대 기록에서는 제일 많이 나오는데 거기를 중심으로 해서 단속사는 진주하고 연결이 되고 남해분사등을 연결할 수 있지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지리산 불교, 지리산권 불교>

두 번째는 지리산 불교, 지리산권 불교입니다.

지리산 불교라고 하면 이 지리산에 행정 구역 쪽으로 맞닿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남원이 지리산에 맞닿아 있지만 남원시내를 지리산 불교라고 보기는 지리산하고 거리가 좀 있기 때문에 어렵고 지리산권 불교라고 하면 남원시내 불교까지 들어가는 겁니다. 지리산 불교라고 하면 구례 정도까지를 학술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지리산 불교가 지리산권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럼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선 사찰이 어떤 사찰일까요.

제가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동안 자료들을 검토해 봤는데 지리산 불교 안에 신라 가야 백제의 불교 유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유물도 없고 문헌도 없으며 유일하게 있는 건 설화 뿐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행정 기준 전라남도라고 하는 이 지역을 놓고 봤을 때 백제 시대의 불교 유물 유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어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굴하지 못 했습니다. 문헌적으로도 없습니다.

그것은 백제가 멸망하는 그 시기까지 현재 전라남도 지역에는 불교가 전례 되었을지언정 제대로 된 사찰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지리산에 백제 시대의 사찰로 이야기되는 사찰들은 있지만 실제로 이제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있는 사찰은 없습니다.

 

이 지리산에 지금까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사찰은 제가 볼 때는 화엄사입니다. 근데 화엄사는 사찰이 굉장히 크잖아요. 이는 처음 지어질 때부터 왕실이 개입된 사찰이란 뜻입니다..처음 지어질 때부터 지금 각황전이 있는 그 자리에 원래 석축에 화엄경을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법당과 석등을 조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무너졌는데 어쨌든 그 이상 시기가 올라가는 사찰은 거의 발견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이제 대략 750년입니다. 백제가 멸망한 게 660년이니까 그로부터 한 90년 정도 지났기 때문에 그때부터 문화적으로 백제와 소통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추정합니다.

그건 바로 불교를 통해서 지리산으로 진출한 것을 보면 중간 지대입니다. 경주에서 경주에서 지리산으로 올 때 길이 남쪽으로 오는 길이 있에 관문이 구례이기 때문에 그래서 화엄사는 그야말로 화합의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창건된 사찰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나름대로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지리산 북쪽 지역에 사찰로서 뚜렷하게 지금 흔적이 나오지를 않아서 그런 측면에서 저는 실상사가 그나마 주목이 되는 겁니다.

물론 실상사는 화엄사보다는 시기가 좀 더 떨어집니다만 신라 하대로 가면서 왕실에서도 뭔가 이 지역을 포섭해야 될 필요성과 더불어 이 지역은 옛날 백제 지역하고 통하는 바로 그런 길목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주목을 했던 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소통의 길목에 있던 사찰로서 이 실상사를 바라봐야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보조 지눌국사와 지리산권>

그 다음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조 지눌하고 관련되는 지점입니다.

보조 지눌 스님은 1158년에 태어나서 얼마 안 지나 무신란이 납니다. 1970년 무렵에 무신란이 본격화되는데 젊은 시절에 국가 중앙의 여러 난들을 경험을 하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봤을 겁니다 .

어쨌든 보조 스님은 사굴사문 출신인데 1182년에 개경에 승과 시험을 치러 올라가 거기에서 젊은 스님들이 모여 우리가 이 불교를 위해서 뭔가 좀 잘해보자 합니다.

지눌스님은 승과시험에 합격하고 권력이 있는 대로를 갈 수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창평 청원사(지금 당양)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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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첫 번째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게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입니다. 그다음이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그리고 세 번째가 ‘간화경절문(看話經截門)’입니다.

성적등지문은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는데, 이 정혜는 선교를 함께 닦으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정은 선이고 혜는 이를 실천하라는 뜻으로 정혜는 선을 해석한 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혜를 선교융합으로 보는 거는 틀렸다고 봅니다.

그로부터 3년 지나서 1185년 경상북도 예천 하가산 보문사라는 절에서 화엄을 보다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당나라 이통현의 ‘신화엄경론’을 보다가 원돈신해문을 깨닫습니다. 즉 경전을 보고 선과 교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선으로서 교를 포섭하려고 한 사상이라고 봅니다.

다음 1188년에 팔공산의 거조사로 가서 거기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면서 1190년에 ‘권수정혜결사문(勸수定慧結社文)’을 세상에 발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사에 동참하여 결사가 크게 성공 합니다. 비문에는 거조사가 결사를 하기에 공간이 협소해서 좀 더 넓은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조사에서 8년이 지나 1198년에 여기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갑니다

 

상무주암에 가서 거기에서 대혜어록에 나와 있는 글을 보고 깨달음을 얻고서 간화경절문을 제시합니다. 상무주암에 가서 이러한 깨달음을 없고 그다음 가는 데가 바로 순천 송광사입니다.

거조사에서 수행할 때 백년 결사의 원묘 요세스님이 결합을 합니다.

이 요새 스님의 비문을 보면 수행하는 방식이 지눌스님하고 많이 다릅니다. 요세스님은 매일 법문을 읽고 또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시는데 반해 지눌스님은 간화선 하는 조용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눌스님이 팔공산 거조사를 떠날 때 요세스님도 같이 떠나시는데 요세스님은 강진 백년사로 가서 백련결사를 하고 지눌스님은 상무주암을 거쳐 송광사로 가게 됩니다. 송광사에서는 행정처리상 순천에도 정혜사가 있어 승인을 안해주고 수선결사로 해서 승인을 받습니다.

 

이후에 지눌 스님이 법집별록절요병입사기(법집절요)”라고 하는 저술을 남겨서.

그 저술 속에 이 세 가지가 다 들어 있고 지눌스님의 비문에도 세 번의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불교사적으로 지눌스님이 살았던 그 시기는 무신란이 일어났던 그 시기입니다.

불교계에서 당시에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불교계에서 법상종, 화엄종등 교종세력은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종은 이미 기존의 귀족들하고 굉장히 가까우니까 근데 선종은 특별히 반대하거나 찬성하나 이런 게 별로 없었습니다..

무신세력 입장에서는 불교를 배척할 수는 없었고 선종이 정혜결사등을 내세워서 명분도 좋은 때문에 선종을 포섭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개경하고 거리도 멀고 재정이나 세력 등을 일부 지원해 주면 지지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송광사에 16국사, 백련사에 8국사도 지원하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실제로 확인된 바로는 송광사에서 국사가 약 12명이 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사찰인 거는 틀림이 없습니다. 송광사가 훌륭했던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국사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신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불교사에서 보면 무신난 이전에는 교종 중심의 불교였다가 무신란 이후에는 선종 중심의 불교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점차 점차 교종 세력은 힘이 약해져서 고려 말쯤 가면 선종이 완전히 압도하게 됩니다. 특히 조계종입니다..

구산 선문이 나중에 합쳐서 조계종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종 안에 천태종등 다른 종파가 들어오면서 구산선문을 하나 묶어서 조계종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1170년 그 무렵에 조계종이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산문들의 힘은 더 약해졌을 것으로 봅니다. 아마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실상산문도 좀 더 힘이 약해져 갔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정이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9개의 산문 중에서 최종까지 살아남는 산문은 사굴산문과 가지산문입니다. 가지산문은 장흥보림사가 본거지이고, 사골산문은 송광사이며 지눌스님 뿐 아니라 고려말 나옹혜근스님도 송광사에 주석하게 되면서 유지하게 됩니다.

 

실상사와 연결시켜보자면 보조 지눌스님이 상무주암에 가셨을 때 실상산문에 오셨을 것 같죠. 기록에는 없으나 거리상으로나 이런 걸로 봤을 때 오셨을 것 같습니다.

 

< 마애불과 지리산권>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주변에 있는 마애블과의 어떤 연관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애블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우선 돌 자체를 불상으로 만든 것은 석불이라고 하고, 큰 바위에다 선이나 조각으로 새긴 것을 마애블이라고 구분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석불이나 마애불이 매우 많습니다. 이는 돌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돌이 오래 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선 석불하고 마애불을 분포된 걸 한번 잘 생각해 보시면 석불은 산 위에 있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옛날부터 평야라든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거기에서 멀지 않은 평지에 석불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마애불은 대부분 산 위에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무엇일까를 저는 개인적으로 좀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전에 사찰의 구조를 살펴봅시다. 삼국시대 사찰이 만들어질 때 그 옛날 발굴된 사찰의 구조를 보면 1탑 1금당도 있고 2탑 1금당도 있고 또 3탑 3금당도 있고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회랑에 저는 주목합니다.

주요한 건물을 짓고나서 회랑을 둘러 치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을 만듭니다. 일본은 지금도 중문형태가 그대로 전승되었고, 우리는 거의 다 없어지고 지금은 중문 자리에 일주문이나 천왕문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그 회랑을 둘러치기 때문에 그 절의 창건주나 귀족, 지방 호족들만 드나들 수 있고 일반 백성은 그 절에 들어갈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일반인들은 부처님을 보고 싶어도 보기 어렵지요.

그래도 지방에서 뭔가를 하고 싶은 유지를 중심으로 백성들이 모여서 만드는 게 바로 석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크게 만들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은진미륵불 같은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지 않았나 봐집니다.

마애불은 그 위치들이 대체로 교통로하고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다 걸어 다니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주요한 지역에 불상을 새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중국 돈황, 돈황은 실크로드의 길목이잖아요. 중국 서안에서부터 출발해서 살아올지 살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 지점에서 기도를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석굴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수백 개의 도랑 석굴이 있습니다. 그 돈황석굴을 만든 주인공들은 상인들입니다..

또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는 지역도 옛날에 백제의 상인들이 중국하고 무역 거래하던 포구에서 걸어 나오는 그 길목에 있어요. 호랑이라든가 도적이라든가 이런 피해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인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마애이블이 아닐까하고 저는 큰 틀에서 그렇게 봅니다. 물론 모든 마애블이 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마애블을 돌에 생기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산신 신앙하고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산신 신앙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산신 신앙 하시는 분들이 주로 바위 밑에 하잖아요. 신령스러운 바위에 부처님을 새기면 산신과 부처가 일치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새기는 마애불 또는 석굴이 전국적으로 굉장히 많은데 이 지역도 굉장히 많은 축에 들어갑니다. 남원 일대도 지리산 중에서도 좀 많은 축에 속하는데 그런 마애블과 실상사와의 어떤 연관성을 우리가 한번 고민해 봐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인근에 보면 실상사가 가장 큰 절이고 고려시대 때 실상산문의 종찰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찰이라고 하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실상사가 폐사지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조선 전기 “신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기록이 나오고 조선 후기까지 계속 폐사지로서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기에 만든 지도를 보면 실상사가 나옵니다. 폐사지임에도 이 지도에 실상사로 언급이 되어야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에서 실상사가 역사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실상사가 조선후기에 다시 중창은 됩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 사람들한테 있어서 사찰의 스님이 거주하든 거주하지 않든 실상사는 이 지역의 정신적인 불교의 지주였다라고 하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인근에 있는 여러 마애불이나 석불 같은 경우는 중앙의 귀족이 개입된 것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기층 민중들의 어떤 바람을 신앙을 담아서 새겼다고 봅니다. 1500년대 후반의 기록을 보면 여기 철불이 석상 위에 있다라고 돼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거기에 기도하고 하는 이러한 영향 속에서 이 마애블들도 같이 봐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려승탑, 실상사 승탑>

이제 마지막으로 승탑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어제 와서 승탑을 처음 가봤습니다. 처음 봤는데 훌륭합니다. 그렇게 훌륭한 것은 왕실이 개입됐다고 봐야 돼요. 왜냐하면 그렇게 훌륭한 장인이 올 수 있다는 것은 왕실의 허락 없이 쉽지 않습니다.

고려시대 때 승탑인 거는 양식적으로 맞을 텐데 아마도 실상산문 자체적으로 어떤 중창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분이 저 사리탑의 주인공이 아니겠느냐 일단 그렇게 이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물론 이것도 근거 없는 추정이기는 합니다만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확인된 고려 시대의 목탑지와 연계돼서 뭔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고려시대 승탑 치고는 굉장히 규모가 크고 예술성은 조금 떨어집니다만 규모 면에서는 굉장히 큰 탑인데 저 정도 있다는 것은 뭔가 이 실상 산문을 위해서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지 않고서는 저 정도 나오기 어렵거든요.

그러면 고려시대 때 실상산문을 위해서 어마어마한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겠느냐 유일하게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저 목탑밖에 없지 않느냐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라하대시기와 고려시대, 지리산 사찰과 대장경판각, 보조국사의 결사와 지리산권, 지리산권의 마애불...

이 종수 교수님의 불교역사와 추정의 논리를 쫓아가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넘었습니다.

역사와 유물등을 지리산 주변으로 배치를 하면서 부족한 상상력으로 채워 본 시간이었습니다.

강의 후에는 실상사의 홍척국사, 수철화상, 편운화상 그리고 고려시대승탑까지 찬찬히 훓어 보았습니다 ~

쾌청한 날씨가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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