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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승탑역사순례4: 조선시대 용담화상(2026,5,15)

다시산내댁 2026. 7. 10. 22:03


실상사 승탑역사순례 네 번째 시간 용담조관스님, 조선시대 차례입니다.

용담스님 뿐 아니라 조선후기 즉 18세기 조선시대의 지리산권 불교의 경향과 고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20대부터 지리산에 관심을 갖고 오십여년간  연구를 해오신 조용섭선생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용담조관은 호가 용담이고 법휘가 조관입니다.

속가의 성은 김씨이고 남원에서 태어나셧습니다. 어머니가 한 마리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고 하며,

9세에 입학하여 15세 이전에 儒業을 이미 완성하여 향리에서 奇童이라 칭하였다고 합니다.

1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동안 세상의 무상함을 관찰하여 19세에 출가합니다.

이미 유가의 법도를 배우고 유가서를 공부하여 儒佛不二의 성정을 지녔다고 봅니다.

감로사 상흡장로에게 의탁하고 삭발하였으며, 태허 취간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당시 儒士들은 출가소식을 듣고 “호랑이가 빈 숲에 들어 갔으니 장차 크게 포효하겠구나” 하고 탄식하였다합니다.

22세에 화엄사로 가서 상월대사를 만나고 24세에는 영남과 호남을 두루 유행하며 유명한 스님들을 두루 만납니다.

영해, 낙암, 설봉, 남악태우, 회암, 호암체정 등 여러 대화상들을 만납니다.

견성암에서 지내며 ‘기신론’을 독송하던 중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단지 이 경지일 뿐임을 홀연히 깨닫고 신비로운 마음이 활짝 열렸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33세에는 영원암으로 들어가 ‘가은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살며 ‘십 년 동안 그림자가 산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멩세하였으나 사람들의 요구에 이끌려 다시 여러 암자를 돌며 20여 년 간 교화의 장을 널리 열었다..

회문산 심원사와 동악산 도림사 그리고 지리산의 여러 암자를 두루 다녔으며

염송의 종지로 용상들을 우리와 새장에 가두고 원돈의 법으로 총림을 확 뒤집어 놓았다.

50세에 상월화상의 의발을 받고 “상월화상의 명을 수행해 2년 넘게 문자공부만 하였으니 어찌 부그럽지 않겠는가”하고 율시 한수를 짓고 대중 강의를 그만두었으나 다시 문도들의 요청이 있어 대암에서 교화의 장을 열었다. 1

972년 세수 63세의 나이로 입적하셨고, 임종 시

“먼저 구품 연화대 위에 올라 옛 주인 아미타불을 우러러뵈리라”고.게송을 읊으셨고, 다비하던 밤에는 신비한 빛이 내원의 골짜기와 하늘에 두루 펼쳐졌다 ..라고 제자인 혜암윤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리는 삭발한 곳인 감로사와 오랫동안 노닐던 곳인 파근사, 입적한 곳인 실상사에 모셔져 있습니다. 실상사와 감로사(천은사)에는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부도가 있으나 파근사에는 이미 폐사되고 조사가 되지 않아 파손된 일부만 용담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용담화상 글>

고사리 꺽으면 넉넉한 밥과국

솔잎 찧으면 발우에 넘치는 음식

 

次幽居韻(차유거운)

新開茅屋小溪邊(신개모옥소계변) 작은 냇가 풀집을 새로 지었나니

松竹依然別一天(송죽의연별일천) 소나무와 대나무 있어 별다른 천지네

不種桃花深有以(부종도화심유이) 굳이 복사꽃을 심어 두지 않는 까닭은

恐將消息世間傳(공장소식세간전) 세상에 알려질까 염려해서네.

 

<조선후기 법맥과 지리산권>

대한불교조계종 종헌 제6조에는

“본종은 신라 헌덕왕 5년에 조계 혜능조사의 증법손 서당지장선사에게서 심인을 받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이하 청허와 부휴 양 법맥을 계계승승한다”

<입제종 해동법맥>

● 중국(임제종): 6조혜능 - 남악회양 - 마조도일 - 백장회해 – 임제의현 - 석옥청공

- 서당지장-도의국사,홍척국사

● 고려 : 태고보우 – 환암혼수 –국곡각운(승련사)

● 조선 : 벽계정심 - 벽송지엄 - 부용영관 - 청허휴정 – 사명유정/소요태능/편양언기/청매인오/중관해안

- 부휴선수 – 벽암각성- 취미수초/백곡처능/모은진언/침허율계

 

▶ 편양언기 - 월저도안- 설암추붕- 상월새봉- 용담조관- 헤암윤장/환암탁계

- 월담설제- 환성지안- 호암체정- 설파상언/연담유일

- 풍담의심- 명진수일- 남악태우- 진곡재초(백장사에 부도)

▶ 취미수초- 백암성충- 석실명안- 태허취간-용담조관

▶ 모은진언- 보광원민- 회암정혜- 한암성안-추파홍유-경암응윤(관식)

 

특히 조선시대 불교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는 지리산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보통 서산대사라고 불리우는 청허휴정은 1520년 평안도 출신으로 10세경 부모가 사망하여

안주목사를 따라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글과 무예를 익힙니다.

15세에 과거에 낙방하고 지리산 여행 중 숭인설은 대사의 권유로 불교에 입문하여 경성일선에게 수계를 받고

부용영관의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며 불교굥부에 힘쓰고, 쌍계사대웅전 중창기도 짓게 됩니다.

30세가 되던 1549년(명종)에 승과에 합격하고, 선교양종판사가지 역임하다가 1556년에는 이를 버리고 금강산. 태백산,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면서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옵니다.

73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 의승병을 모집하고 직접 전쟁에 참가하고

다시 묘향산으로 가서 85세인 1604년 입적합니다. 사리는 묘향산과 해남 대흥사에 모셔져 있습니다

서산대사의 청허당집에는 지리산 황령암기가 수록되어 달궁지역이라고 추정하는 황령암이 1538년 무술법란시 불태워졌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휴선수 스님은 1543년 남원 오수 출신이르 20세에 출가하여

지리산 부용연관(1485 진주출생/ 1571 의신암에서 입적)의 법맥을 이었습니다. 덕유산, 가야산,지리산,속리산, 금강산 등에서 수행하고 1611년 영원암에서 주석하였으며, 이때 유몽인과도 만나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이름이 오릅니다.

송광사, 칠불암에서 수행하시다 1615년 칠불암에서 입적하셨습니다.

해인사,칠불암,송광사,백장사에 부도가 있다는데... 백장사에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벽암각성스님(1575~1660, 보은 출생)은 부휴계 스님으로 임진왜란 의승수군 참전하셨고

칠불암, 하동 신흥사에 주석하셨습니다,

인조때인 1624년에는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화엄사,쌍게사,해인사,법주사,송광사 등 유명한 절들을 중창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1667년 화엄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18세기 지리산 불교>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긴 하였으나 수행이 높으신 스님들과 유사들과는 교류가 있었고, 유불선이 다 통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스님들은 여러 사찰을 다니시며 수행과 교화를 주로 하셨고, 특히 지리산은 예부터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이곳을 찾은 스님들의 기록이 많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백여년이 지난 18세기에는 화엄강학이 성행하고 그에따라 화엄경과 화엄경 해설서, 소초등의 판각과 인쇄,보급하는 일도 확대되습니다. 특히 지리산 영원사와 벽송사가 그 주 무대가 됩니다.

영원암에 주로 머물던 설파상언 스님은(1708~1791) 화엄학에 정통하였는데, 화엄경을 강설하고, 구송으로 과거에 이룩했던 80권본을 다시 판각하게 하고 영각사에 경판각을 짓고 봉안하였다고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 설파상언스님의 부도는 영원사에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불교 특징이 염불 신앙이 대두가 됩니다.

우리가 삼문수행하면 경절문 원돈문 염불문 등 경전, 선수행, 염불등의 세가지 방법을 말하는데

18세기 지리산 불교에서는 이 삼문 수행 계속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한편 영원암에서 만일결사가 1772년 일어납니다.

그 ’영원암 만일회 書‘에 보면

“근세의 우리 불도들은 그 가야할 곳을 모릅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만 달리는 병이있어서 참구를 숭상하지만 염불은 경시합니다. 강경하는 사람은 문자에 얽매여서 사람을 얻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면서 또한 이 문을 소홀히 합니다. 이것은 말세의 큰 병입니다. 그렇기에 백화 ,문곡, 환암 등 여러 장로들은 강도(講徒)를 사절하고 오래도록 심요 (心要)를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염불도 하나의 수행의 중요한 방편인데 하근기라 해가지고 너무 경시하는데 그렇지 않다’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남원불교>

마지막으로 남원불교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많은 사찰들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동국여지지(1656년) 용성지(1699~1752냔) 운성지(1922년)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상사 관련 실상사를 중창하신 침허율계스님은 부휴선수계 스님이셨습니다.

1913년 실상사 주지를 역임하였던 포광 김영수스님은 영원사출신으로 1923년 환속하셨는데 근현대기 불교학자로서 전북대학교, 원광대학교에서 활동하시고 신라하대불교에 대한 논문으로 신라하대불교를 살린 것으로 평가를 받고 계시답니다.

실상사는 1680년 중창된 기록을 중심으로 1586년 청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1686년 우담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기록되어 실상사 상황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귀정사와 선원사등에서 나타난 고승들의 행적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귀정사는 백제 무령왕이 515년에 찾았다는 전설외에도

백련결사로 알려진 원묘요세국사가 보조지눌국사와 정혜결사에 참여했다가 상무주암에서 헤여지면서

1198년 귀정사를 지나가다가 8년간이 묵었다는 기록 이야기도 새로웠습니다.

뿐만아니라 서산대사의 제자인 중관해안이 만년에 귀정사 소은암 옛터에 대은암을 중창하고 그곳에서 참선수도에 경진하였다는 기록과 능허대사의 부도를 귀정사의 동쪽에 세웠다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중관해안의 부도는 최근에 우연히 발견하기도 하였답니다.

특히 1929년 부산일보 보도에 선원사의 괘불기우제를 보도하면서

1888년 귀정사의 괘불(석가모니불괘불탱)을 선원사로 이동했으며,

선원사의 괘불은 조선제일의 대불화라며 가뭄에 선원사에서 괘불기우제를 지내다라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간단히 살펴볼 때에도 남원 불교가 고려부터 조선까지 큰 스님들의 흔적이 뚜렷한 곳임을 알 수가 있고,

우리 실상사 같은 경우는 구산선문부터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고려시대까지는 기록이 별로 없는 실상사 역사를 추정하느라 힘들었는데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다양한 기록과 자료들이 존재하는데...

이를 찾아내고 또 엮어내는 것 또한 만만한 일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