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바람 쏘이기- 여행

산사문화재활용사업(흥선스님과 답사) 논산사전답사 (2025,3,24)

다시산내댁 2025. 5. 16. 18:06

4월12일로 예정된 흥선스님과 답사를 위해 사전답사를 다녀오다.

논산 주변이 이렇게 기호학파 관련된 인물들의 아지트가 있는지 처음 알다. 

광산김씨 김국광과 그 후손들, 그리고 파평윤씨 윤황과 그 자손들... 그리고 관촉사와 계룡산 신원사. 

한번으로 모두 볼 수 없어 두 번 가기로 하였다.  4월 12일과 6월14일.

 

이번에는 

-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림인 김국광(묘소와 사당)

- 그리고 5대손인 김장생(고택, 종가, 묘역,염선대)

- 김장생 아들인 김집(사당, 묘, 재실)

- 그리고 돈암서원과 황산서원(죽립서원)

- 그리고 관련된 팔괘정과임리정

** 대부분 건물들이 문이 닫혀 있고, 관련 지식은 전무하고... 앙꼬없는 찐빵

 

기호학파 광산김씨 김국광(1415~1480) 의 묘와 재실

본관은 광산, 호는 서석.

세종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들을 역임하였다.

수양대군이 한명회등과  함께 단종의 왕위를 찬탈, 김종서 부자 등을 참살하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란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었다

세조때 오랑캐의 침입을 맞아 함경도 경차관으로 공원세워 병조팜판,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세조때(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남이장군과 함께 평정하였는데 이시애의 난은 함경도 토호가문 출신으로 조선의 중앙정부통제력이 강화되고 양전과 군액으로 토호의 부담이 가중되었던 시기에 일으킨 반란이다.

세조의 명으로 노항,노사신과 경국대전을 편찬에 착수하여 성종때 반포하였다.  

 

 

사계 김장생(沙溪 : 1548년 ~1631년) , 김국광의 5대손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 정치인. 문묘배항 동국 18현 중 한 명

 

김장생은 12세 나이에 송익필에게 사서와 근사록등을 배우고, 19세에 율곡이이에게 배우고 33세에는 성혼문하로 들어간다.

당시 기호학파의 핵심인 심의겸, 이이, 성혼, 정철등과 교우하여 파주5인방으로 불리었는데, 특히 정치적 감각이 탁월하여 서인세력의 막후실력자로서 군림하였으며 스스로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사림처사로 자처하였다.

선조부터 광해군까지 약 30여년 간 비중이 낮은 경외의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중국사행에 참여하거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 군량을 모집하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회양부사, 철원부사등 비중이 낮은 관직에 머물러 학문에 몰 두 할 수 있었던 점도 있다. 1599년 "가례집람"편찬.

 

조선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이기론을 바탕으로 심성론 발달)이 발달하고,

이는 사회윤리론인 예학의 발달을 초래하였다. (이기론에 기반한 인심도심설, 사단칠정설등 심성론 논쟁)

  그러나 이시기는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의 질서는 크게 와해되어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예학의 현실적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 상황.  이런 시기 김장생은 기호학파 송익필과 이이의 적통을 계승한 서인계 사림학자이다.

조선예학의 기초를 닦고 조선후기 서인-노론 학맥의 중추가 되었다.

 

선조말엽부터 왕위겨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파되어 격렬한 싸움/

1613년(광해군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김장생 소북파와 연루되어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넌간 학문에 몰두.

결국 서인.남인세력은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며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정권장악으로  중앙무대에 진출. 

1624년 이괄의 난(반정 후의 논공행상 과정상의 문제)이 일어나고,  1627년(인조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역할을 하다

1631년 84세 나이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