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스님과 함께 한 화요답사4 : 익산의 백제흔적
백제 30대 무왕이 익산으로 온 이유는? 다음 의자왕때 다시 부여로 돌아간 이유는 ?
백제시대 기록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 익산 일부를 돌아보다
제석사터, 왕궁리 5층석탑과 유적, 미륵사지와 미륵사탑, 이 세 곳을 둘러보고
미륵사박물관에 들러 발굴된 유물을 둘러보다. 무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는 익산 쌍릉은 못보고 통과.
<제석사지>
- 발굴 중 제석사라는 이름을 새긴 기와가 나왔고 7세기 백제기와가 다수 출토된 곳이다.
- 기록으로는 7세기 중국에서 작성한 "관세음응험기"가 일본인이 베껴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제 무왕께서 지모밀지(익산)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장사를 경영하였다. 그때가 정관14년(639년)이었다. 때마친 하늘에서 노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려 새로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었다'
-제석사터 목탑지 심주초석에서 기록발견






<왕궁리 유적.>
왕궁이 었던 흔적이 있고(기와, 화장실, 배수로등) , 석탑만 덩그라니 있다.
이 5층탑은 상윤부가 없슴에도 불구하고 490cm*290cm 의 크기이다
백제탑의 특성을 갖추었다 : 지붕돌이 얇고 평평하며 지붕받침돌이 삼단이다(신라탑은 오단)/ 지붕돌 끝이 들렸다/ 우동이 입체형이다/ 1층 지붕돌이 기단끝보다 길다/ 단층기단이다(기단은 전형적인 실라형태. 2층중 상단)/ 기단에 탱주2이고 귀기둥이 있다.







<미륵사지>
- 용화산과 미륵사 : 못과 늪지, 무왕과 무왕비무왕의 왕비는 사택지적의 딸이다 (사택씨는 백제 8대 귀족중의 하나)
무왕에 관해 삼국유사에서는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하면서 자라고 서동요의 주인공인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서동의 설화가 전해지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자식이라 기록되어 있다.
- 미륵사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원조이다(심초석에서 정확한 기록 발견. 사리봉영기, 639년 / 감은사탑은 682년)
미륵사탑과 정림사 오층탑만이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돌로 만들었지만 짜맞춘 것을 보았을 때 목탑과 똑같다.
1965년 해체시 석탑밑에 목탑자리가 그대로 있었다(?). 1층 몸돌에서 합과 순금함. 19장의 금강경판 발견.

















